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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집 아르바이트에서 생긴일.

20살때의 일이다. 2007년 11월쯤으로 기억한다.
고등학교 졸업후 매주 주말 웨딩홀 알바를 꾸준히 했다. 그러다 조금 더 시간을 쪼개서 용돈을 벌어보고자 치킨집 아르바이트를 구해서 시작했다. 치킨집의 상호명은 두리아? 두리안바비큐 치킨이였는데. 두리아인지 두리안인지는 정확하게 기억되지 않는다. 사장, 사모부부 내외가 운영하는 치킨집이였고 겉에서보면 1층인데, 내부구조는 1~2층으로 나뉜 복층구조였다. 나는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저녁 5시(오픈) 부터 밤 12시까지 (총 7시간) 근무 조건이였다. 내가 오픈을 하고 나면 저녁7시부터 새벽 1시까지 일하는 1살 위의 형님이 출근을 하였고, 이후에 9시부터 새벽3시(마감)까지 근무하는 형님이 마지막으로 출근을 하는 구조였다.  당시 나는 대입 재수를 하고 수능을 마친 상황이였기 때문에, 당시 대학 입학원서와 수시준비로 바쁜날을 보내던 시기였다. 그래서 다음날 피로도를 고려해서 오픈부터 밤 12시까지만 일하는 조건이 잘 맞아 아르바이트를 선택했던것이였는데, 사장님 내외는 꼭 12시가 넘는 12시반 1시까지 일을 시키곤 하였다. 사실 급여도 제대로 잘 챙겨줄지도 의문인 상태였다. 그렇게 며칠을 시간을 준수하지 않고 일을 시키는 사장님 부부의 행동에 나도 더이상 참지 않고 12시가 되자마자 들어가보겠다며 일방적인 통보를 하고 퇴근을 하였다. 며칠을 그렇게 행동을 하고나니, 사장님께서 나를 부르시더니 ‘너는 인지상정도 모르냐, 바쁘면 일을 더 할 수도 있는 거고, 우리가 너보다 어른인데 그렇게 쌩하니 퇴근하는 경우가 어딨냐, 그리고 출근 시간 5분전에 와서는 부랴부랴 오픈 준비하는게 어딨냐, 사회생활 진짜 못한다’라는 식으로 나를 몰아붙이는거였다. 계속 이렇게 행동하면 알바 그만두라는 것이였다. 나는 너무 억울했다. 내가 초과로 근무한것에 대해선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부려먹더니... 게다가 오픈전 5분전에 와서 앞치마만 두르고 바로 일을 시작했었다. 외투를 벗고 앞치마를 묶는데까지 단 3분이면 충분한 시간. 출근 후 처음 하는일이라고 해봐야 테이블을 닦고 음료 냉장고 전원을 켜는 정도의 일이다. 10분이상 일찍와서 일을 해야하는걸까? 그래야만 나한테 주는 시급 3600원이 아깝지 않은걸까? 그들의 인지상정은 도대체 어떤 기준인지, 지금 생각해도 기기 막히는 이야기이다. 당시 중학생과 초등자녀를 키우는 사장내외였는데.. 20살인 나는 함부로 해도 되는 대상이였나보다. 이외에도 그들의 기준없는 잣대로 나를 저울질하고 빈정섞인 폭언들을 수시로 해왔다.
그렇게 불편한 관계를 이어가던중,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다. 손님이 엄청나게 붐비는 금요일이였다. 당시 가게는 소주를 주문하는 손님에게는 계란찜(조그만뚝배기에 조리된)이 제공되었다. 그날 유독 계란찜 요청이 상당히 많은 날이였다. 바쁜 와중에 내가 계란찜 뚝배기를 여러개 올리고 조리를 하였는데, 사모님이 그게 탐탁지 않았는지 내게 ‘너는 돈도 안되는걸 그렇게 열심히 만드니! 니가 초짜인거 알고 너한테만 계란찜 달라고 하는거 같애!!’ 하면서 짜증을 내는거였다. 워낙 바쁜 날이였기 때문에 그냥 그말에 ‘죄송해요..’하고 답하고 말았는데 그날은 사모님 말처럼 내가 만만했는지 유독 장난을 많이 치는 직장인 손님 테이블이 있었다. 2000cc를 주문하곤 2000cc양이 적다며 나보고 타박을 하는것이였다.(가득 담은 맥주였는데 그냥 나한테 장난을 치는거였다) 그래서 나는 ‘큰사이즈로 주문하시면 양이 많아요’라고 답했다.그랬더니 5000cc를 주문하는거였다.(5000cc 피쳐 용기가 따로 있음) 나는 주문대로 5000cc를 제공했고, 한참 뒤에 다시 콜을 누르는거였다. ‘그러더니 빈 5000cc용기를 내게 주면서 여기에 5000같은 3000cc를 달라는거였다. 아마도 손님의 의도는 주문서에 3000cc체크를 하고 용기에 가득담은 맥주를 기대했던거 같다. 워낙 사장과 사모가 구박을 많이 하던 시기라, 나는 깨끗한 3000cc용기에 3000cc를 가득담아 서빙을 했다. 그런 행동에 화가났는지 취한 손님이 테이블에 있던 맥주 피쳐 용기를 들고 내 옆통수를 내리쳤다. 아주 강하게 내리친건 아니였는데 주변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강도 있게 휘둘렀다. 나는 그간의 아르바이트를 통해 받았던 설움과 손님이 나를 향한 인간적인 모욕에 폭발하고 말았다. 나는 바로 경찰에 신고를 했다. 그 손님은 내가 싸가지없네 뭐네 하면서 소란을 피웠다. 당연히 사장과 사모가 테이블로 왔고(당시 사건이 있었던 장소는 2층) 가까운 곳에서 순찰을 돌돈 경찰이 5분도 안 되어서 도착했다. 사장 사모는 경찰의 등장에 놀랐는지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경찰을 돌려보내려고 했었다. 그러면서 내게 폭력을 휘둘렀던 손님들은 잽싸게 계산을 하고 내게 폭행을 휘두른 손님을 부축하곤 현장을 떠나려고 했다. 그 와중에 경찰이 사건을 확인하기 위해 손님들을 가로막자 사장과 사모가 무슨일 생기면 우리가 책임질테니 돌아가라고 하면서 그 현장은 정리?가 되었다.
나는 내게 폭력을 휘두른 손님에게서 사과조차 받지 못했다. 그러고나서 사모는 내게 삿대질을 퍼부으며 ’너 남의 장사 망하게 할 생각이야! 니맘대로 경찰을 불러 !! ‘ 하면서 소리를 꽥꽥 질렀다.
너무나 서러웠다. 지켜보던 사장이 오늘은 일단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나는 앞치마를 집어던지듯 풀어헤치고 집으로 귀가했다. 집으로 돌아오는길 혼자서 많이 울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내가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항상 알바 끝나고 밤늦게 귀가하는데,, 때는 밤11시경. 분명 엄마가 이상하게 생각할거 같았다.  흘린 눈물도 감추려고 번화가에 있는 공중화장실에서 세안도 하고 얼굴의 홍조가 가라앉을 때까지 동네를 배회하다 귀가했다. 추운 겨울이였다.

다음날 오후 사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출근하지 말란다. 알바비는 정산해서 계좌로 넣었다는 문자가 끝이였다. 미안하다는 말은 당연히 없었고 그날의 일들은 그렇게 덮어졌다.

그러고나서 그 가게는 오래 유지되지 않았던거 같았다.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군입대전 동네 친구와 그 가게를 다시 찾은 적이 있다. 가게 사장은 바뀌어있었고, 손님도 그 전처럼 많지도 않았다. 지금도 그 가게앞을 자주 지나치곤 하는데 가게는 사라진지 오래되었지만 매번 그날의 사건이 떠오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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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조직에나 조직의 암덩어리 같은 빌런들은 항상 있다. 나도 9급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빌런을 만났다. 그 빌런의 주인공은 옆팀 차석. ( *차석은 팀 내 팀장 다음의 서열이며 팀 내 실무자 중 최고참급이다.) 여기서 잠시 이 차석에 대한 부연 설명이 필요할 거 같다. 이 차석은 90년대부터 기능직으로 시작하여 2000년대 중반 시험절차도 없이 일반직 공무원으로 전향한 소위 기능직 출신 공무원이다. 기능직에서 7급으로 전향된 분이다 보니 63년생으로 나와 함께 있던 당시 50대 초반으로 실무자 중에 가장 연장자였다. 2000년대 중반 갑자기 선임 7급으로 전향된 탓에 당시 8,9급이었던 내 선배 주무관님들은 승진에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었다. 그렇다면 업무능력은 어떠할까? 결론은 형편없다. 전체 기능직 출신 공무원에 대하여 일반화는 아니다. 그분은 정말 형편없었다. 공직 내에서 듣고 보고 한 것은 있어 아는 것은 많았다. 항상 훈수 드는 편이다 보니 크고 작은 갈등에서도 빠지지 않게 이름이 오르내리고, 입으로만 떠드는 게 전부인 손가락 까딱 않는 요즘말로 핑거프린스? 였다 조직 내에서는 기능직 출신들을 승진에서 배척하는 편이다 보니 퇴직직전 6급 승진은 겨우 했지만 보직은 못 받은 걸로 알고 있다. 항상 출근과 동시에 초과근무 지문 클릭 > 청사 내 헬스장 > 업무시간에 무협지 독서 > 퇴근 후 업체 관계자자랑 술약속 등 말 그대로 월급루팡이었다. 업무는 함께 있는 팀원의 몫이며 복무태도도 불량하다. 워낙 고인 물이다 보니 팀장들도 따로 터치조차 하지 않는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야기를 이어가면, 우리팀과 옆팀의 업무가 비슷하다 보니 업무들 중에는 애매하게 걸쳐있는 업무들이 종종 있었고 소위 업무핑퐁으로 인한 갈등이 잦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옆팀 차석이 외부에서 온 공문 1개를 내 자리로 가지고 오더니 친절히 가르쳐주는 척 내게 이래저래 설명을 늘어놓았다. 분명히 우리 팀 업무가 아니었다 심지어 우리 팀 내에서도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업무이기도 했다. 그냥 내가 만만했던 거다. 내게 핑퐁 치기 위해서 빌드업 중인 거다. '이렇게 저렇게 처리하면 될 거 같고 어려운 거 아니다. 어려워 할거 같아 알려준다'는 식으로 정말 x소리를 늘어놓는다. 평소 예스맨이었던 나였지만 이 사람이 선을 넘는 건 두고 볼 수 없었다. ‘저희 업무가 아니에요. 주무관님네 팀장님과 의논해 보세요.’라고 했다. 내 대답은 내알바 아니니 너네 팀 내에서 해결해라는 말을 최대한 우회적으로 한 것이었다. 그다음 돌아오는 답이 가관이었다. ‘네가 9급이라 잘 몰라서 그래. 너네가 직재순으로 선임팀이라 이런 건 너네가 챙겨서 하는 거야 ‘ 10년이 지난 지금에도 다시 곱씹어봐도 정말 어처구니없는 답변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어느 누구에게도 해당하지 않는 분장사무라면 직재순이 높은 선임팀이 하는 게 맞다. 하지만 당시 업무는 본인 업무임에도 업무 수순이 복잡하고 기존에 하던 것과 달라서인지 하기 싫다는 표현으로 핑퐁 치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다음 ‘내가 결정할 일은 아닌 거 같으니 우리 팀장님이랑 얘기해 보세요’ 하니 그다음은 본인도 불편해서인지 본인팀으로 돌아가 결국엔 본인 팀 내 막내 주무관님께 핑퐁을 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 거 같았다. 결국엔 본인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손을 빌린 셈이다.
그러고부터 1년 뒤에 공교롭게 이 형편없는 차석과 같은 팀이 되었다. 이 사람과는 8급이 되기 직전까지 함께했었는데 그와 함께 있는 동안엔 팀장을 두명 모시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하루가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로 하루종일 키보드를 두들겨야 했고 팀 내 모든 민원은 내가 도맡아 처리하고 전화든 신문고든 답변 또한 내가 해야 했다. 하루는 차석이 저녁에 고생한다고 밥 사줄 테니 장어집으로 오라고 한다. 6시 퇴근시간을 넘기고 부랴부랴 업무도 다 마치지 못한 채 차석이 말한 식당에 택시를 타고 갔다.(장어식당이 대중교통이 닿지 않는 곳에 위치하였음) 가게에 도착하니 관련업체 관계자들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본인 업무 관련 사업자도 아닌 내 업무와 관련한 업체였다. 재미도 없고 영양가도 없는 이 불편한 자리. 적당히 맞춰주고 집으로 갔다. 자기 돈으로 후배직원 밥도 못 사주는 병 x이라고 생각했다. 이 사람은 능력도 인격도 바닥인 걸로... 사실 이때는 차석뿐만 아니라 팀장 또한 빌런이었다. 나이 많은 차석이라 말도 못 하고 그가 하는 데로 방관하였다. 당시에는 차석보다 팀장이 더 미웠다. 내 전임자는 여름휴가 없이 일했었다. 옆팀에서 지켜볼 땐 왜 저러나 싶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팀장과 차석의 가스라이팅이 있었던 거 같다. 매일 같이 했던 얘기가 기억난다. '젊을 때 배워나야 고생 안 해. 지금이 가장 많이 배울 때야' 당시에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머리가 크고 나니, 적어도 공무원 업무 중에는 남의 일 해주면서까지 배워야 할 일은 없다는 거였고, 그만큼 어려운 일이 아니고 단지 귀찮은 일을 내게 줬을 뿐이었고 나를 애정해서 한말이 아니라 날 이용하기 위한 잔꾀였다는 것이다. 다행히 팀장이 곧 인사발령으로 떠났고 새로운 여자팀장님 김 00님이 오시게 되었다.
새로운 팀장님은 성격이 그야말로 지x같았다. 근데 난 그 지 x 같음이 좋았다. 나한테만 그런 게 아니고 차석에게도  x 같았다. 오히려 더 심하게 했던 거 같다. 차석과 함께 끝장나가면 차석은 항상 팀장욕을 했었다. 난 딱히 동조하지 않아다. '혼자 떠들어라. 난 모르겠다 싦으며 떠나라' 속으로 생각했다. 오히려 나는 팀장님이 내게 지 x 할 때마다 '팀장님한테 혼나고 저 오늘 기분 안 좋으니 점심은 맛난 거 사주세요, 저녁에 술 사주세요'식으로 들이댔었다. 걸걸하신 분이다 보니 내 반응이 잘 먹혔었다. 밥도 술도 잘 사주셨고 업무적으로 지도도 잘해주셨다 현재는 과장님이 되셨는데 내겐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주신다. 8급 승진에서는 선임을 밀어내고 승진했었는데 이때 이 팀장님이 큰 역할을 해주셨다. 지금까지도 감사함을 느낀다
팀장님과 형편없는 차석은 다음 인사 때 정리되었다. 차석은 본인이 희망원을 내고 다른 구청으로 수평이동으로 떠났고 새로운 홍00주 무관님이 오시면서 우리 팀은 전성기를 맞는다. 팀장님은 차석과 사이가 좋지 못했지만 그의 송별회를 비싼 식당에서 서운치 않게 대접하고 보내드렸다. 차석이 미웠을 텐데 끝까지 인간적인 도리를 다하는 모습에 팀장님의 넓은 아량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품성과 태도에 나도 조직 내 관계에 대해서 하나 배울 수 있었다.

같은 과에서 나를 괴롭힌 빌런과의 2년은 이렇게 끝이 났다. 공직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에서 이런 빌런들은 주변 곳곳에 있다. 이런 빌런들은 염치도 눈치도 없고 얼굴도 두꺼워 파렴치하게 주변인들을 괴롭힌다. 지금도 그런 빌런들에 대항하기 위해 항상 나를 단련시킨다. 다신 만나고 마주하고 싶지도 않다. 남들은 싫은 사람 핸드폰 번호를 지우지만, 나는 철저히 기록하고 남겨두었다가 실수로라도 받지 않는다. 그만큼 다시는 어떤 말조차도 섞고 싶지 않다. 이런 분들에겐 많이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내일만큼만은 제대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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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살 2월. 대학을 졸업했다. 4학년때부터 취업을 위해 이것저것 시도해 보았지만, 뭐 하나 당당히 이뤄낸 거 없이 결국 졸업을 맞이했다. 이때의 내 스펙이라 하면 토익 700점대, 한국사능력시험 1급, 국가자격증 1개, 컴활 2급 이외에 공공기관에서 서포터스로 활동했던 대외활동 이력 3개 정도.

그러나 목표는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공기업이었다. 내가 시도했던 곳은 당시 기관명 한국수력원자력공사, 인천공항, 한국전력 등이었다. 사실 이공계 계열이어도 토익 700점대는 서류전형 통과는 꿈도 꾸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자소서에 희망을 기대어봤지만,,.. 직장에 들어온 지금에서야 생각해 보면 그 많은 서류의 자소서를 읽어보기나 할까. 자소서는 면접에서 힘을 발휘할 정도이지 서류전형엔 영향이 없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던 중 가족의 권유로 공무원시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9급 공무원이 되려면 국어, 영어, 한국사 이외 기술과목 2개 총 5개 과목을 공부해야 했다. 국가기술자격증 공부를 하면서 기술과목 2개에 대한 공부는 어느 정도 되었다. 한국사능력시험 1급이 있었기에 공무원 한국사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의 주요 과제는 국어와 영어. 27살의 2월 말 매형과 함께 노량진에 갔다. 매형도 수험생이었던 시절이 있어, 내게 여러 문제집과 참고서를 추천해 주셨다. 기술과목은 기출문제집, 공통과목은 참고서만 구입했다. 그리고 매형이 국어와 영어 인터넷 강의를 결제해 주셨다. 이때의 매형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난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 수험시절 매형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매형은 정말 은인이었다. 우리 누나가 사람 보는 눈은 있었나 보다.

 

매일 아침마다 어머니가 싸주신 도시락 2개를 들고 동네 도서관을 향했다. 매형이 등록해 준 국어와 영어 인터넷 강의는 60강 100강 정도 되는 긴 강의였다. 시험은 당장 같은 해 6월 21일 내겐 시간이 별로 없었다.

도서관 정보화자료실에서 하루종일 강의를 들으며 필기를 정리했다. 가능한 한 빨리 나만의 참고서로 축약시키려고 했다. 강의는 1.5배속. 낮에는 인강을 듣고, 정보화자료실이 마감하는 18:00 이후에는 열람실에서 노트정리. 주말에도 어김없이 그렇게 생활했다. 여자친구와의 만남은 월 1~2회. 올해 떨어지면 헤어지겠다는 여자친구의 언포가 있었다. (여자친구는 이미 취업해서 직장인이었음) 이렇게 2개월을 도서관에서 인강만 들으며 지냈던 거 같다. 그러고 나서 남은 1개월 남짓 기간 동안은 문제풀이와 오답노트 정리에 열을 올렸다. 매일같이 5과목 기출문제를 도서관에서 오전 중에 풀어냈다. 사실 1번에 합격할 거라는 기대조차 없었다. 일단 하는 데까진 해보자, 다해본 후에 내년을 기약하자는 게 내 목표였다.

 

그렇게 시험일을 맞았고, 오래 공부하진 않았지만 최선을 다했다. 시험시간에 맞춰 모든 문제를 풀어냈다. 오히려 시간이 남아 취약 부분이었던 영어에 좀 더 시간안배를 해서 시험을 마쳤다.

 

시험결과 발표까지는 약 1개월 남았고, 하반기에 있을 7급 공무원 시험도 치를 계획이었기 때문에, 추가적으로 2과목을 더 공부해 나갔다. 항상 도서관에 있었기 때문에 관련 서적을 도서관에서 찾아서 공부했고, 7급 공채시험은 꾸준히 있지 않았기 때문에 기출문제에 대한 자료가 많이 부족했지만 다른 수험생들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으로 그냥 열심히만 했다. 동시에 생활비에 보태기 위해 주말에는 간간이 아르바이트를 했고 여자친구도 전 보다 자주 만났다. 

 

그렇게 9급 시험발표일은 다가왔고, 공무원시험을 치러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공무원시험 결과 발표시간은 시험을 주관하는 지자체 인사팀 재량이다. 하루종일 발표를 기다렸지만 공무원이 퇴근하는 6시 넘어서도 발표는 나지 않았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술 한잔 하러 나간 사이에 공무원 시험 필기합격자 저녁 발표가 8시경에 났다. 내 수험번호가 있다. 합격이다.

너무나 기뻤다. 지난주 받은 아르바이트 비용은 이날 술값으로 지출했다.

공무원 필기에 합격하고 나면 2차 면접등록을 발표일로부터 3일 이내에 해야 한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면접등록을 하고, 면접에 유리할 수 있는 사회 봉사 활동 실적을 등록하고 증빙서류도 제출했다. 합격의 기쁨이 커서인지 전날 마신 술의 숙취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면접 경쟁은 최종 선발 2인에 면접자는 4명이다. 50% 확률, 필기보다 면접이 더 자신 있다. 자소서를 써본 경험도 많았고 발표나 브리핑을 잘하는 편이다.

 

공무원 학원에 전화를 넣었다. 면접을 도와줄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다. 학원에서는 다른 합격자(나와 경쟁해야 할)가 있어 나를 도와줄 수 없다고 답변하였다. 면접까지는 대략 2주 정도 남았던 걸로 기억한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어디서 도움받긴 틀린 거 같고 면접도 혼자서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예상질문과 1분 스피치, 나를 어필할 수 있는 필살멘트를 만들고 도서관 벤치에서 혼자 읊조리며 발표연습을 했다. 

 

면접 당일날은 매형이 출근을 하면서 면접장소에 데려다주었다. 면접시간이 9시 반이었던 터라 8시 40분쯤 청사에 도착했고 매형은 다시 운전을 해 본인의 일터로 출근을 했다. 9시경에 사전 답변서를 작성하고 30분쯤 대기하고 있다가, 내 면접은 10시경쯤 진행하였다. 나와서 시간을 챙겨보니 약 20여분 정도 시간이 지나있었고, 이날 나의 경쟁자 3명 모두 면접에 참석했다. 1명 정도는 불참하길 기도했는데.. 그리고 나만 빼고 나머지 셋은 서로 아는 사이였다. 같은 학원출신인 거 같다.

면접은 전반적으로 무난했고 1분 스피치 없이 본 면접에 돌입해서 정책과 관련된 소신, 공무원의 덕목 등 기본적인 질문과 답변이 오갔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냐는 질문에 '난 자기 어필을 하고 싶다' 하고 필살멘트를 날렸다. 면접관들은 내가 웃겼는지 깔깔깔 웃었고, 면접의 마지막을 서로 웃는 모습으로 마무리했다. 면접은 이래저래 무난했던 거 같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특별하게 공격적인 질문이 없었다면 합격선에 있는 거라고 한다. 내 면접이 그랬던 거 같다. 

 

약 1개월을 기다려 합격자 발표가 났다. 오전 10시 20분 경이였다. 오전 10시경 발표한다고 했던 것이 20분 정도 딜레이 돼서 공고되었다. 합격이었다. 여자친구도 발표시간만 기다린 거 같다. 사무실 컴퓨터 앞에서 합격자 페이지만 새로고침 하고 있다고 한다. 여자친구의 부모님도 좋아하셨다. 우리 엄마가 가장 좋아하셨다.

엄마는 결혼부터 하라고 하신다. 당시에는 무슨 얘기야 했는데, 엄마말이 맞았다. 그때 결혼해서 조그만 집이라도 샀더라면, 지금쯤 부동산으로 자산이 많이 불어났을 거다. 부모님 말씀을 헛투로 들으면 안 된다. 

 

이후에 임용대기가 약 6개월 정도 있었다. 대기하는 동안 가까운 물류창고에서 아르바이트도 잠시 하고, 임용대기가 길어질 거 같아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연구소에 기간제로 일을 시작해서 공무원 임용 전까지 돈을 제법 모았다. 그동안 사고 싶었던 DSLR 1대를 구입하고 여자친구와 캄보디아로 여행을 다녀왔다.

 

공무원 시험을 치렀던 그해에는 빈 공간 없이 하루하루 꽉꽉 채우면 살았던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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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월 말에 시작한 공부에서 6월 필기시험, 7월 면접, 8월 최종합격하였다. 이후에 임용대기를 하고 다음 해 2월에 공무원에 임용되었다. 공부를 시작하고 딱 1년 만에 공무원이 되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짧은 시간을 들인 가장 큰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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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ENTJ 공무원입니다.

저는 30대 중반의 남자 7급 공무원입니다. 연봉은 세전으로 4,900만 원 정도(7급 9호봉). 아내와 자녀 1명이 있습니다. 맞벌이 부부라 셋이서 지내기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은 없습니다. 최근 (2023년 11월)에는 20평대 신축아파트에 입주를 했습니다. 대출이 70% 이지만, 대출금 이상의 현금자산을 보유하고 있어 실상은 새로운 투자처를 찾기 위한 전략적 레버리지로 보시면 될 거 같습니다. 국산 SUV차량 1대, 경차 1대 저와 아내 각각 보유하고 있고, 아이는 현재 아파트 내 어린이집에 등원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부부합산 연소득 1억 미만의 평범한 서민층에 속합니다. 고연봉의 좋은 직업도 아니고,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을 재산하나 없는 그저 우리 생활곳곳에 있을만한 그런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나름 대도시의 근교에 자리를 잡고 나쁘지 않은 인프라 속에서 공무원이라는 철밥통 직업 덕분에 어느 정도 먹고살고 있습니다. 경제적 여유는 없지만 요즘같이 연애도 결혼도 어려운 시절에 이쁜 아내, 귀여운 아들과 함께 한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끼곤 합니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서 '나쁘지 않게 살았구나', 스스로를 위안할 때도 있고, '왜 이것밖에 못 했을까?' 하고 스스로를 탓할 때도 있습니다. 행복했던 시간도 있고 불행했던 시간도 분명 있었을 텐데. 행복했던 것보다는 불행했던 기억이 제 머릿속을 채울 때가 더 많을 때도 있습니다.

 

어릴 적 일찍이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어머니와 누나들 저, 이렇게 남은 가족들끼리 어렵게 어렵게 달려왔습니다.

아버지가 떠난 지도 30년이 지났네요. 어머니 고생에 보답하듯 누나들과 저 모두 결혼해서 나름의 보금자리를 꾸미고 잘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없다는 것이 어린시절에는 큰 상처였고, 떼어낼 수 없는 콤플렉스처럼 저를 괴롭혔는데, 제가 아버지가 되어보니 그 공백 때문일까요. 제 스스로 더 좋은 아버지가 되려고 하는 노력의 추진력이 되어주곤 합니다.

 

여유롭지 못했던 유년, 청소년시절을 보내면서 나의 처지, 내상황에 대한 비관도 참 많이 했었습니다. 변변한 대학은 아니었지만 서울시내 사립대학에 진학하였고 학자금 대출만큼만은 안된다며 어머니는 꾸역꾸역 제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정말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이제 와서 보니 학자금대출이 없어 사회생활의 시작을 순조롭게 할 수 있었던 거 같네요. 적은 돈이지만 9급 공무원을 시작하며 희망을 보기 시작했던 거 같습니다. 어머니에게 정말 감사드립니다.

 

20살이 되고부터는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해야 했습니다. 아르바이트를 쉬어본 적이 없었던 거 같아요. 방학이면 공장아르바이트, 매주 주말에는 웨딩홀+돌잡이 사회, 물류센터, 치킨집, 캔모아(빙수집) 등 학기 중 사용할 용돈 마련을 위해 열심히 치열하게 일했습니다. 힘이 들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건 사람을 코너로 몰아넣는 무서운 압박이기도 했지만 오히려 뭐든 해야만 하는 의무감을 부여했어요, 제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니깐요. 나중에는 일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은 제게 좋은 기회라고 여겼어요. 덕분에 그 경험들 하나하나가 지금의 제가 있게 해 준 거 같습니다. 

 

제 아내는 참 좋은 사람입니다. 아내와는 20살에 만나, 30살에 결혼했습니다. 그리고는 지금 저희에겐 만 5세 아들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아내와의 세월도 15년이 훌쩍 넘었네요. 없는 형편에도 좋은 사람을 만나 20대의 연애도 참 재밌게 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가진 건 없어도 사람 보는 눈은 있었던 거 같습니다. 좋은 사람 만나 참 괜찮은 인생 살고 있습니다.

 

현재의 저는 누구나 그렇듯 대출금을 매월 갚아나가야 하고, 경제생활을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오늘보다는 내일의 더 나은 삶을 기대하는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소소하게 할 수 있는 부업도 찾아보고, 이직도 고려해보고 있습니다. 어렵게 들어간 공직이지만, 현재의 공직은 과거와 달리 워라밸이 좋은편도 아니고 외부에서 알고 있는 것과 달리 공무원의 복지혜택도 그리 좋은 편도 아닙니다. 공무원에겐 경제적 안정감이 주는 이점이 워낙 커서 큰 결심 없이는 이직이 어려운 직업군입니다. 이직하고 싶다는 말은 습관처럼 뱉고 있지만, 아직 결심이 선 단계는 아닙니다. 어쩌면 이렇게 정년까지 공무원을 할 수도 있고요. 지금보다는 더 경제적 성공을 이루고 싶네요

 

저는 앞으로 저의 과거, 현재, 목표 이야기 등의 자서전을 써 내려갈 계획입니다. 제가 스스로 저를 돌아보고 저를 객관화하고 스스로를 정리할 시간을 가져보려 합니다. 이 블로그에 작성하는 글들이 30대 중반의 제게 터닝포인트가 되는 기회로 만들어주길 기대해 보며 프롤로그는 이렇게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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